걸음을 뗄 때마다 발 밑에서 마른 풀이 바스라진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져 들판의 풀들도 노르스름해지고 천지사방 넓게 펼쳐진 숲에는 오색 단풍의 선명한 색채가 가득했다. 시절이 바뀌어 낙엽이 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새삼스럽다. 제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단풍잎을 집어 들었다. 처음 내려앉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 아직 색이 바래지 않았다. 핑그르르 돌리자 손 끝에서 작게 바람 부는 소리가 난다. 아이 손바닥 같아. 제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닮은 모양새를 덧그렸다. 따라와 곁에 앉는 재민 때문에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날의 재민은 온몸이 흉기 같았다. 그날, 자다 말고 일어나 나가라고 황급히 내쫓던 날. 전에 겪었던 괴로움을 떠올리니 아무리 재민이 등을 떠밀어도 두고 가기 어려웠다. 제노는 그저 하고싶은 대로 했다. 말을 들을 걸 그랬나 나중에 후회하기는 했다. 다 받아내고 생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던 동안에는. 전에도 급하고 거칠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게 제법 자제하려 노력한 거라는 걸 제대로 알았다. 고통이 더 크기는 처음이어서 무서웠다. 벗어나질 못하게 하고 전혀 살펴주질 않았다. 부러 괴롭히는 느낌마저 들어 울음이 터지자 미안하다며 매달려왔다. 입으로만 미안하다 하고 허리 아래는 여전히 짐승 같았지만 밀어내지 못했다. 그 또한 재민이라 생각하니 방사가 지독하고 집요했던 것은 참을만 했다. 제노가 견디기 힘든 것은 전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알 수 없는 재민의 의중이다.
대국에서 식량을 가져다 준 이래 재민의 언행은 또다시 뜻을 알기 어려웠다. 사람의 일은 계속해서 변하기 마련이라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르니 헤아리기 벅차다. 제노가 오늘 멀리까지 나오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소한 일이나 재민의 고심은 곧 저의 고심이 되니 퍽 답답했다.
해동청 좋아해요?
네. 말 다루는 것만큼 익숙하지 않아 그렇지 제일 좋아해요.
초원에는 커다란 새들이 많지만 해동청은 흔하지 않았다. 원래는 대륙의 동쪽 끝 먼 땅이나 천산 너머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 귀한 새를 고원 너머의 일가가 보내왔다. 식량을 나눠받은 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영리하게 잘생긴 어린 매는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새끼인데도 나래가 평범한 사냥매보다 갑절은 컸다. 반질반질한 부리도 발톱도 날카롭고 커다래 장차 얼마나 자랄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미가 그 일대에서 가장 큰 새라고 했으니 수컷인 새끼가 성장하면 아마 그 어미를 능가할 것이다. 제노는 본디 말보다도 새를 더 좋아했다. 응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해 포기했지만 그래도 가까이 두고 보는 것은 여전히 좋아했다. 해동청은 부왕에게 진상된 것이었으나 제노의 기호를 아는 부왕이 일찌감치 선물로 내려주셨다. 신이 나 새장을 안고 돌아와 제게 속한 응사에게 맡기고 조석으로 찾아가 보았다.
파오 안에 들이지 그래요.
그래도 돼요? 냄새나고 시끄러울 수 있어서..
왜 안 됩니까. 괜찮습니다.
재민이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새장을 아예 옮겨왔다. 새를 돌보기 위해 시종들이며 응사가 무시로 파오를 드나들었다. 좀 불편하려나 싶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재민이 의외의 말을 했다. 매 다루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잠시 고민했으나 제노는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는 것보다 위험하고 어려운 것이 매를 길들이는 일이다. 기수들은 걸음마를 떼면 말에 올랐지만 응사들은 대여섯 살 먹어도 매에 접근이 어렵다. 사람을 우습게 알기 때문이다. 서너 살 먹은 아기는 먹이로 알고 채가는 일이 있을 정도다. 애초에 배우기 쉬웠다면 제노가 포기했을 리 없었다. 이런 사정을 다 설명했는데도 재민은 고집을 부렸다.
결국 제노의 형인 대왕자가 스승이 되어 가르치기로 정해졌다. 스스로 배우고 싶다 나서기에 제노는 재민이 새를 제법 좋아하나보다 했다. 그런데 첫날 수업에 쫓아가 살피니 새와 친밀해지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재민과 매는 서로 전혀 호감이 없었다. 끈기있게 배우려는 태도였지만 대왕자와 제노의 눈에는 다 보였다. 주위의 다른 응사들의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매는 영리한 동물이다. 시간이 좀 지나자 재민이 저를 꺼려하는 속내를 파악하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부러 위협하는 것처럼 달려들고 먹이만 받아먹을 뿐 말을 듣지 않았다. 기싸움에 지친 재민을 다독이는 것은 오롯이 제노의 몫이었다. 울적하여 초저녁부터 제노를 안고 누운 재민을 차분히 설득했다.
그만두시는 게 좋겠어요.
이제 겨우 첫날입니다.
응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무나입니까?
부왕께서도 매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지 않으세요. 초원에서 제일 가는 용사라 해도 반드시 응사의 자질이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새를 길들이는 것이기도 했지만 새가 주인을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제노가 기르는 해동청과 같이 큰 새인 경우에는 더더욱 까다로웠다. 공연히 힘만 빼고 재민의 마음이 상할까 걱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으로 나섰는지도 모르겠고. 재민의 조그만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며 어찌 달랠까 고민하는데 불쑥 품 안으로 안겨 들어오며 웅얼거렸다. 전하가 좋아하시잖아요.
제가 해동청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나..
말을 이으려다 문득 생각이 미쳐 멈추었다. 설마. 머리를 잡아 떼고 얼굴을 확인하니 입이 댓발 나와 있다. 눈을 억울하게 뜨고 노려보지만 실상 억울한 건 이 편이다.
왕야, 아니지요?
뭐가요.
설마. 아니지요?
..
제가..
설명을 하려다가도 기운이 빠져 할 말을 잃었다. 제노는 크게 한숨을 쉬고 야트막한 코 끝을 깨물었다. 아야. 엄살을 피우는 재민의 뺨을 쥐고 눈을 맞춰 또박또박 말했다. 새장을 치우고 응사도 자주 부르지 않을께요. 훈련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왕야와 함께 나가 확인하면 되겠습니까. 눈을 내려뜬 채 제노의 말을 다 듣고난 재민이 볼을 작게 부풀린 후 한 마디를 보탰다. 따로 보지 마세요. 제노가 순순히 알겠다고 하자 민망했는지 입술을 씹었다. 못하게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누르니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얌전해진다. 이전에 재민이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었다. 그래도 저를 따른지 수 년이 된 응사를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양인이라지만 이미 짝도 있는 사람을 내칠 명분은 더구나 없었다. 사정을 다 아니 타박은 못 하고 엉뚱한 수를 냈구나 싶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러믄요?
어디 한 번 말씀을 해보시라는 제노에게 재민은 아까보다 더 부어터진 얼굴을 해보였다. 말을 정리하려는지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동안 제노는 잠자코 기다렸다. 드러난 것은 해동청과 응사의 일 뿐이지만 요즘들어 재민의 심사가 시끄러운 것을 알았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먼저 말해주지 않으면 잘 모른다. 복잡다단한 속내를 파악하는 것에는 아마도 영영 서투르지 싶다.
저도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시잖아요.
도와주는 것 말구요. 제가 할 일이요.
음.. 갑자기 왜요?
갑자기가 아니지요. 온 지도 한참 되었습니다.
그 말에 제노는 물끄러미 재민을 보았다. 여기에 계속 계시게요? 물어봐야 할까. 말을 꺼내자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조용히 보다 한숨만 쉬고 말았다. 재민이 황성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접은 건지 궁금했지만 자신이 없다. 대국에서 사신이 왔다 간 이래 한동안 눈에 띄게 침울해했고 이후 황성으로 소식을 자주 보내고 있다. 제노가 돌아가고 싶으신 거냐 묻자 버럭 화를 내고 아니라고 했지만 글쎄. 설사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제노에게 밝히지는 못할 거다. 재민은 이해한다는 소리 좀 그만하라 했지만 제노는 정말 이해하려면 할 수도 있었다. 저 때문에 재민이 괜히 이 먼 곳까지 와 고생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더욱. 제노가 이해할 수 없는 건 차라리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이다. 황성으로 꼬박꼬박 소식을 보내는 것도 태후의 건강이 염려되어 그런다지만 제노가 같은 인편을 통해 태후에게 효경을 필사해 보내겠다는 말에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딱 잘라 거절해놓고 자기가 더 놀랐는지 허둥댔으나 제노가 속상한 건 거절 때문이 아니었다. 필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제노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서녕에서 식량을 팔고 물품을 사들일 때 말씀도 잘 하시고 흥정도 잘 하셨다 들었어요. 그런 일을 맡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안돼요.
왜요?
같이 다니실 겁니까? 저는 전하 곁에 있는 게 아니면 싫습니다.
저 하는 일은 고되고 힘들어요.
어쨌든요. 고되고 힘든 일을 나누는 게 낫지요.
그러더니 기껏 벌려놓은 거리를 단번에 좁혀 들어와 끌어안았다. 전하와 떨어지기 싫어요, 우리 둘은 한 몸이니 초원에 같이 있어야 합니다. 저랑 같이 다녀주세요. 장난스레 중얼거렸지만 어딘가 다짐 같은 말이었다.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지 못한 말에 대한 답으로 삼았다. 여기 계속 있고 싶은가 보다. 곁에 있어주려나 보다. 정이 깊어져 다행이다. 그러다보면 한 가지가 더 궁금해졌다. 그러면 아이는? 아이는 여전히 안되는 걸까 아니면 이제 괜찮은 걸까. 아까보다 더 자신이 없어 묻지 못하는 사이 쇄골부터 입을 맞추기 시작해 자연스레 옷이 벗겨졌다. 옆구리와 허리가 만져지고 이내 바로 눕혀져 재민이 올라타는 대로 자리를 고쳐 잡으면 또한 물을 말을 잊었다.
이랬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니 여전히 답을 모르고 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합니까?
왕야 생각을 했습니다.
저요?
네.
단풍만 물끄러미 보고 계시더니?
제노는 웃었다. 단풍만 보고 있었다고 투덜거리는 재민이 귀여웠다. 재민은 제노더러 귀엽다 소리를 곧잘 했지만 제노가 보기에는 재민이 더 귀여운 짓을 할 때가 많았다.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 이렇게 귀엽다가도 어른들 앞에서는 의젓하고 잠자리에서는 능글맞고 음흉하다. 재민의 속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가늠이 안되는 상대이니 제노는 그저 하고싶은 대로 할 뿐이다. 지금처럼. 가만히 앉은 재민에게 입을 맞추고 재빨리 몸을 돌려 다시 앞을 보았다.
갑자기 이러시기 있습니까?
왜요, 싫으세요?
아니오.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을 건 또 뭐람. 뻔뻔한 재민을 따라해 보려던 제노의 얼굴이 붉어진다. 민망한 줄 모르고 떠들어대는 것은 따라하기는 커녕 가만 들어주기도 힘들었다. 살짝 입 맞추고 떨어져 나간 제노를 향해 싱글벙글이더니 대뜸 양 손으로 뺨을 쥐고 입술을 물어온다. 고개를 틀고 아예 눕히려 드는 것을 어깨를 두드려 말렸다. 왕야아. 요즘 들어 번번이 이런 식이다. 빌미를 주면 옷부터 벗기려 드니 제노로선 손가락 하나 대기 어려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떼자 한 번 더 잡으려 든다. 손바닥으로 막으려다 서운해하던 것이 떠올라 목을 답싹 끌어안았다. 재민의 등을 살살 쓸어내리며 달랜다. 또 어디서 혼자 불이 붙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깔고 누울 것도 없는 맨땅이었다. 좀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왕야, 춥습니다. 이제 돌아가요.
안은 팔을 풀고 제노가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웃으며 잡아온다.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는 재민의 손바닥 안에 우연인지 장난인지 단풍나무 잎이 들어 있었다. 제노 또한 그 손을 감싸쥐며 웃었다. 붉은 단풍잎이 손바닥 사이로 가슬하니 쓸린다. 재민이 가볍게 팔을 흔들었다. 천천히 맞잡은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긴다. 손바닥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에 조금씩 가슴이 뻐근해졌다. 여전히 말해주지 않을 모양이니,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조바심낸다 해서 달라질 것도 아니고. 제노는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은 차가워진지 오래지만, 함께 걷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겨울이 가까워지자 재민은 부쩍 추위를 탔다. 초원의 겨울은 매섭고 혹독하다. 눈보라가 며칠씩 이어지기도 한다. 재민은 우기 때처럼 지내면 된다 호언장담 했지만 제노의 생각은 달랐다. 가을을 거치면서 부쩍 마른 재민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마다 잔기침이 잦아졌다. 결국 첫 서리가 내리던 날에 제노가 부왕과 모후를 졸라 서녕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정했다. 좀처럼 초원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굴던 재민도 쉬이 받아들이고 좋아했다. 망망한 설원을 함께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서녕 쪽에도 눈은 많이 내리니까. 겨우내 눈 구경이 부족하지는 않을 듯 했다. 지낼 거처를 알아보러 지성과 시종 몇몇이 먼저 떠나고, 짐을 꾸리는 동안 재민은 내내 곁에 있었다. 갈수록 한 발자국도 떨어지려 하질 않아 의아했다. 싫은 것은 아니나 모후가 사람을 보내 청할 때에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서녕으로 가면 해가 바뀌어 오겠구나.
예. 눈이 녹을 즈음 돌아오려구요.
간 김에 대국의 풍습이나 생활도 익혀 오면 좋지.
모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은 초원에 온 이래 이곳에 적응하려 노력하고 있다. 꾸며내고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러니 서녕으로 가 대국의 땅 안에 머물게 되면 제노 또한 그를 본받는 게 옳을 터였다.
서녕성에 들면 의원을 찾아보거라.
의원이요?
이곳의 의원보다야 나을테니 진맥이라도 받아두는 게 좋지 않겠니.
멍하니 눈을 꿈벅이는 제노를 보고 모후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혼인한지도 합방한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태평하다며 핀잔을 들었다. 내외가 둘 다 아이처럼 철이 없으니 안 생기는 걸 수도 있다 놀리시기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알아들었으니 제발 그만 하시라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질이 약해 그런 것일 수 있으나 아직은 둘 다 어리니 심려치 말고. 그게 문제라 하면 차근차근 돌보면 된다.
.. 예.
괜한 걱정으로 속이 상할까 먼저 살펴주시며 당부가 길어진다.
아이가 생기면 이제 네 가족은 여기에 있는 우리가 아니고 부군과 아이이니 다른 것은 신경쓸 필요 없다.
예.
네 누이가 회임했을 때 전한 말인데 어미가 그새 나이를 먹었는지 조급해지는구나.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겪어보지 않았으니 감히 안다고 할 수 없다. 제노는 마음 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고민을 숨기고 그저 웃어보였다. 먼 길 떠나는 어린 아들을 두고 모후의 한숨이 깊어지지 않도록.
서녕의 새 거처로 옮긴 첫날의 밤은 아주 장황했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 산 채로 잘근잘근 씹어먹힐 것 같았다. 씻자고 들어간 욕탕에서도 붙드는 바람에 침전으로 돌아오면서부터는 식은땀을 흘리며 골골 앓았다. 걱정을 괜히 했지. 누가 불과 며칠전까지 기침하며 한기에 몸을 떨던 사람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침상 안에 들자 재민이 또 비척비척 벗은 몸을 붙였다. 뭘 더 하자고 들지는 않아서, 따끈한 체온을 느끼며 졸았다. 기분좋게 잠들기 직전이었는데, 어깨에 턱을 걸치고 있던 재민이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말을 걸었다. 전하. 간지러워 움츠렸다가 재차 불러와 소리를 들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기운이 없어 엉겨붙은 걸 뿌리치지도 못한다. 저기 보세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재민이 일러주는 방향을 바라봤다. 홍라 휘장 위로 붉은 초가 타고 있었다.
신방 같지요. 화촉 밝힌 것 같지요.
그러고 보니 제대로 신방을 꾸린 적도 용봉화촉을 밝힌 적도 없다. 아니, 신방을 꾸리기는 했으나 어떤 사람이 파투를 내 아무 일도 없었다. 화촉 또한 준비했었으나 불을 붙이지도 않고 초야가 끝났다. 대국과 훈서의 풍습이 다르기는 해도, 초야에 화촉을 밝히는 것은 같을 것이다. 밤새 켜두었다가 아침에 부부가 함께 끄면 화목하고 백년해로 한다고 했다. 붉은 촛농이 많이 녹아내려 복잡하게 구불거릴수록 아이가 많다고도 하고. 그런데 어차피 둘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재민은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속삭이는데, 이상하게 부아가 났다. 절로 뚱한 대꾸가 튀어나간다.
초가 한쌍이 아니잖아요. 하나잖아요.
아아.
용봉화촉이잖아요. 용, 봉. 그럼 두 자루 한 쌍이어야지.
맞네요. 하나 더 켤까요?
.. 그냥 두세요.
묘하게 툴툴대는 말투에도 힘주어 안는다. 등 뒤의 재민은 살뜰히 안아주는데, 제노의 기분은 편치 않았다. 소용 없는 다정이다. 내내 붙어 있어도 아무 것도 모른다. 이내 이리저리 헝클어진 제노의 머리를 쓸어주며 재민이 물었다.
전하, 왜요.
뭐가요.
기분이 별로시잖아요. 왜 그럴까요.
.. 아닙니다.
달래는 듯한 말투에 괜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더 불편해진다. 뭐가 불만이실까. 이건가. 갑자기 손을 내려 아래를 더듬어와 화들짝 놀랐다. 하지 마요, 하지 마아. 한사코 막아서자 재민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어라. 제노는 엎드린 그대로 얼굴을 침상에 묻었다. 보여주기 싫었다. 전하, 전하. 연거푸 부르는 소리에 마지못해 돌아누우니 재민의 얼굴이 불빛에 그늘져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가만 바라보다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기에 제노도 따라 일어나 앉았다.
뭐 하세요.
초 한 자루 더 밝히려구요.
안 그래도 된다니까요.
그럼 말씀하세요. 제가 뭐를 잘못했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정말 계속 이러실 겁니까. 저 섭섭하려 합니다.
왜, 왜 왕야가 섭섭해요?
서운한 거 있으면서 말 안해주잖아요 지금.
자기는 말 안하는 거 더 많으면서. 제노는 결국 다시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재민도 따라 입을 다물었다가, 그래도 제노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여염의 풍습은 황궁과 달라 저도 잘 모릅니다. 재민이 보고 겪은 것 중에 평범한 혼사는 없을 터였다. 이야기로나 들은 예속을 하나 둘씩 제노에게 전했다.
대국에서는 신방에 원앙문양을 많이 쓴답니다. 원앙(鴛鴦)글자에 원(怨)과 앙(央)이 들어있어 부부의 인연을 의미한다구요. 정이 있어 원망이 맺히고 상사를 앙구한다 합니다. 금침에도 올리고 베갯잇에도 누비고 탁자 위에도 목각을 둡니다. 목각은 문발치에 기러기로도 둬요. 두 사람이 문을 나서도 서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기원하는 거랍니다. 그거는 좀.. 뜻이 좋아서 기억하고 있어요.
정이 있어 원망이 생기고 상사를 바라게 된다라. 글자보다 풀이가 더 뜻깊었다. 눈을 깜박이며 되새겼다. 아마 지금의 이 심란함도 그 때문이겠지. 원과 앙이 있어야 부부의 인연이 맺힌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려나. 원망하지 않으려 애써도 소용 없으려나.
훈서의 풍습은 전하가 알려주시면 됩니다. 전하 하고싶은 대로 다 해요.
그런 거 아닙니다. 초가 하나던 두개던 상관 없어요.
결국에는 풀이 죽어 목소리가 작아졌다. 마주앉아 눈치를 살피는 재민은 무언가 오해를 한 모양이다. 자꾸만 제노더러 하고싶은 대로 하자고 하는데, 죄다 신방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초야에 무례하게 소박놓은 것이 여지껏 신경 쓰이긴 하는지. 제노 또한 그날을 유쾌한 기억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이제와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자꾸 들먹이면 신경질이 나기는 해서. 입술을 꾹 물고 모로 누워 눈 감아버렸다.
그날에야 소박을 맞았지만 나중에 서로 마음이 생기고 깊어졌을 때 맺어져 상관 없었다. 초야나 신방의 이야기가 듣기 거슬리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실은 내도록 재민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원래의 성미답지 않게 망설이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언제든 울컥 치밀어 오를 물음이다.
아이는 원하지 않는다면서요. 그런데 왜 자꾸.
어쩌다 실수라든가 조심성 없이 그러는 게 아니다. 요즘의 재민은 꼭 수태라도 시킬 듯 굴었다. 어째서? 초야 뿐 아니라 처음 합방하고 난 다음날에도 아이는 원하지 않는다 했고 이제껏 다른 소리도 없었다. 제노가 가진 음인의 기질이 약하여 딱히 조심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쏟아부으면 또 모를 일이다. 안 그래도 지난번 발정기가 전보다 거세게 와 걱정이 많았다. 그 사이 마음이 바뀌었나 기대하기엔 제노가 말리는 소리마다 다신 안 그러겠다 대꾸를 잘했다. 초원의 부락에 아이들이 여럿이었고 심지어 이곳으로 따라온 시종 중에도 아이 딸린 이들이 있어 곳곳에 보였으나 재민은 그 아이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예뻐하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알 수가 없다. 아이가 가지고 싶은 건지 아니면 조심을 덜 하게 된 것 뿐인지.
물어보면 분명해질 일이나 묻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다른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예 무념할 때에는 상관 없었는데 이렇게 재민의 행동이 바뀌니 알게 모르게 기대가 생긴다. 처음 들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던 아이는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제는 조금 슬프고 못마땅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손을 보고싶은 게 지나친 욕심일까. 재민이 처음부터 안된다 못박아 이제껏 생각도 안했었다. 뜻을 꺾고 싶지 않았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절절히 와닿지도 않았다. 이대로 아무 결실이 없다고 해도 부부로서의 정분이 덜해질 것은 아니지만은. 제노는 그저 궁금했다. 아이가 생기면 어떨지, 무엇이 달라질지. 그 아이는 어떤 아이일지. 제노의 모후는 아이가 생기면 이제 네 가족은 부군과 아이가 되는 것이라 했다. 재민과 저만으로도 단 둘이서도 이미 가족이었지만 아이가 더해지면 또 어떨지 알고 싶었다.
아이가 생기면 지금도 때때로 찾아오는 불안이 조금은 덜해질 수 있을까. 제노 또한 이제는 재민이 황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불안했다. 재민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둘의 혼인이 둘만의 결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민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했던 것이니 전과 달리 아이를 원하게 되면 이 혼인의 의미도 달라질 것만 같았다.
아니 모든 걸 차치하고라도 저를 닮고 재민을 닮은 아이가 갖고 싶다. 언젠가 둘이 함께 있었고 서로 사랑했던 확인이 되어줄 테니.
아니다. 재민을 더 닮으면 좋겠다. 훗날 어떻게 되든 아이가 자라는 건 오래 두고 볼 수 있겠지.
그러니 이제와 재민이 거듭 아이는 원하지 않는다고 못 박으면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미 제 입으로 다 알겠다고 해놓고, 알아서 하시라 해놓고 말을 번복하기도 어렵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답을 할걸. 오기에 단정지어 말해놓고 제 생각만으로 뒤집을 수도 없는 것이다. 고집부려 될 일도 아니고. 입도 떼어보지 못하고 포기하려니 서글퍼진다. 그렇지만 제노가 이런 생각에 서글픈 것을 재민이 알 필요는 없었다. 지금도 괜찮다. 제노 혼자 느끼기에 너무 좋거나 너무 슬픈 것, 모두 재민이 알 필요는 없다. 제노는 제가 이렇게까지 겁이 많고 생각이 많은 사람인지 이전엔 미처 몰랐다. 재민과 관련된 일에서만 그렇다. 두 눈에 걱정을 담고 따라 누워 저를 살피는 재민과 시선을 맞춘다.
왕야, 입 맞춰 주세요.
.. 예?
빨리이.
당황하여 눈치를 보면서도 슬금슬금 다가와 입술을 붙인다. 맞물려 저항없이 벌어지는 사이로 혀가 닿으면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말캉했다. 망설이던 재민이 고개를 틀어 놓치지 않고 더 깊숙이 파고든다. 몸이 바로 눕혀지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허리를 들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 돕는다. 몸을 타고 내려가는 혓바닥에 제노가 목을 그러 안으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와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비슷하게 마른 몸. 같이 흥분하고 같이 커진다.
서로 더 가까이 끌어안으려 팔이 엉키고 다리가 얽혔다. 아래를 주무르는 것도 뒤를 여는 것도 다 한가지로 성급하고 거칠다. 재민 뿐 아니라 제노도 조급히 굴었다. 어깨죽지를 물고 손을 뻗어 등이며 옆구리며 허리를 연신 더듬어 만진다. 손바닥 모양으로 서로의 몸에 화인이라도 찍을 것처럼. 매순간 더운 숨을 나누고 서로의 몸을 탐해 적신다. 왕야아, 아. 아읏. 신음 사이로 서로를 부르며 바짝 열이 오른 아래가 갈퀴로 찍힌 듯 이어져 계속 흔들렸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밀려 들고 더 밀려 들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바짝 다가오는 얼굴이 보인다. 열중해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오로지 저만 쫓는다. 제노는 저를 더 열어 더 크게 품었다. 가까워질래. 꼭 한 몸처럼. 하나처럼.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혼자 더 절절해서 생기는 간극을 다 메울 것처럼.
가까이 밀착되어 맞닿은 가슴이 눌리는 느낌에 버겁다. 제노는 제 귀에도 생경한 소리로 흐느끼며 앓았다. 그래도 재민의 팔을 붙들고 목을 그러안고 등을 잡아긁으며 버티고 받아낸다. 재민이 다 쏟아내길 원해서. 남김 없이 다. 정이며 상사고 원망이며 바람을. 전부 다. 허투루 흘려 보내기엔 아까웠다. 어디로도 가지 말고 전부 제 안에 고여 하나로 품었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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