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sh your happ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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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h your,

Wish your happy day

by Angma423 2021. 1. 14.

현준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회식으로 갔던 가게에서 오랜만에 마주쳤고, 술김에 한 부탁이었다. 다음날 새벽 숙취에 시달릴 때쯤엔 다 잊어버렸다. 그래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재민은 좀 당황했다. 현준은 전처럼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했다. 화질도 별로고 분량도 그닥인데 받으러 올래?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너 나온 부분만 편집할 수 있으려나 나도 잘 모르겠다.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혹시 나 연습할 때 영상들 남은 거 있겠냐고, 팬미팅 때 쓰고싶다고 현준에게 말했던 게. 현준은 그 부탁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저 못지않게 술에 취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와중에도 용케 챙겨들었다. 어쩌면 껄끄러웠을 수도 있는 부탁을 들어준 게 고마워서라도 가야했다. 거기다 대고 파일만 보내달라고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현준은 이제 더 이상 아침저녁으로 보던 매니저 형도 아니고, 재민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줘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때는 집처럼 드나들던 옛 회사의 사옥으로 운전해 가면서 재민은 자꾸 입술을 씹었다. 따져보면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몇 년만에 가는 길 같다. 익숙했던 만큼 낯설어진 지금이 선연하게 와닿는다. 

짙게 썬팅된 차창 밖은 한여름이다. 도로 양 옆의 나무는 무성하고 해가 내리쬐는 길에는 사람이 적었다. 언제 이렇게 더워졌지. 하반기에 들어갈 작품의 로케로 한동안 남반구에 다녀왔더니 여름이 되어 있었다. 계절의 흐름마저 잊고 바쁘게 지냈다. 내년 입대를 앞두고 피치를 바짝 올리는 중이어서. 전에는 다소 텀을 두었던 팬미팅도 생일에 맞춰 이르게 준비하고 있었다. 심란한 속내와 별개로 팬들은 좋아했다. 내년 생일에는 사회에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들을 꺾었다. 

신호에 걸려 멈춘 사이, 멀리 보이는 건물 앞에는 드물게 여학생들이 복작댄다. 이렇게 더운데.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속으로 혀를 차게 됐다. 이제 재민은 이름도 모르는 어떤 후배들을 보러왔을 거다. 오래 전에는 저를 보러 저렇게들 왔었다. 온다고 늘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애정하는만큼 사람은 미련해진다. 보답받을 길도 없는 애정은 때때로 더 단순하고 맹목적이다. 보기도 했고 겪기도 했다. 마냥 좋지는 않았다.

현준은 이제 이사 직함을 달고 있다. 사무실을 찾아가 악수를 하고, 다른 사람이 내주는 차를 얻어마시고, 짧게 안부를 나눴다. 외출 허락을 받아내느라 생글생글 웃어보이던 날들에서 까마득하게 멀어져, 이제는 잘 정돈된 어른의 대화를 한다. 여전히 형이라 부르고 서로의 대소사 정도는 챙기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은 어쩔 수 없었다.

 

온 김에 한 번 둘러보고 가. 연습하는 애들 보고 갈래? 

제가 봐서 뭐해요. 그리고 막, 보여줘도 돼요? 회사기밀 아니야?

기밀씩이나. 봐서 영 아니다 싶은 것들 골라주면 나는 시간 아끼고 품도 덜고 좋지.

감 떨어져서 못 봐. 봐도 모를걸요.

감 떨어지기는, 벌써?

지성이더러 보라고 하면 되잖아요, 회사에 잘 있는 애 두고 왜 나한테. 나 산업스파이 누명쓰면 형이 책임질 꺼예요?

지성이? 걔 바뻐. 애들 좀 들여다 보라고 해도 맨날 말로만 알겠다고 웃으면서 내뺀다고.

 

농담처럼 한 마디 두 마디 툭툭 던지다보니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재민도 현준도 잘 알고 편한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하기 싫을 때면 슬그머니 없어지는 버릇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도 언제 돌아갔는지 모르게 사라져 한참 웃었던 게 기억났다. 제 할일 똑부러지게 하고 말도 행동도 신중하면서 그런 면은 여전히 어린애였다. 막내노릇을 너무 오래 시켰지. 현재를 공유하지 않으니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가 제일 무난하고 즐거웠다.

 

맞다, 오늘 제노 나와있을 건데. 보고 가.

 

아마도 현준은 이 또한 즐거운 주제가 되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한껏 올라가있던 재민의 입꼬리가 다소 가라앉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너 영상 찾아놓고 대충 봤는데, 제노가 안 걸리는 샷이 없어. 너만 나오게 편집하려면 죽어나겠더라. 재민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제노하고 너무 붙어다녔어서, 그때는. 과거형이다. 말하면서도 아직 실감나지 않는 과거형. 그래서 너 재계약 안하고 회사 옮길 때 놀랐잖아. 현준의 말에 조금씩 현실로 돌아온다. 재민은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러게요. 온 김에 보고 가야겠네요.

 

 

 

 

 

 

 

 

 

 

 

 

 

 

현준이 일러준 연습실에 제노는 없었다. 다만 환하게 불이 켜져있고, 한 켠에 놓인 소지품들을 보고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으리라 짐작했다. 돌아오겠지. 오래는 아니어도 기다릴 시간은 있었다. 재민은 연습실 안쪽의 소파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바깥으로 이어지는 문이 열려도 잘 보이지 않을 자리였다. 괜찮으려나. 뒤로 몸을 길게 펴 누우면서 잠깐 망설인다. 이제는 남의 회사라서. 그래도 습관이 무서웠다. 어떤 날은 숙소 침대보다 여기가 더 편하고 안락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게 연습이 고되던 날에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실내는 좀 추웠다.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곧 반팔 소매 아래로 소름이 오도도 돋을지 모른다. 한여름에도 이렇게 서늘한 곳에서, 땀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연습을 했었다. 힘들지만 힘든 줄 모르던 시절이었다. 더 이상 흘릴 땀이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제는 힘들다고 느꼈을 때 재민은 재계약을 포기했다. 노력해서 극복할 문제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한만큼 종장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미련 없이 다른 길을 택해 떠났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재민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살짝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쩌면 하나쯤은 간과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없어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재민아..?

 

찾는 것처럼 부르는데도 답을 하기 어려웠다. 몸을 일으켜 여기 있다고 해야하는데 선뜻 움직여지질 않는다. 숨은 것처럼 되려나. 무력한 생각을 하는데 발을 쓱쓱 끄는 소리가 들리다가 우뚝 멈췄다. 봤구나. 찾았구나. 속이 더 시끄러워진다. 제노가 저를 반가워 해도, 반가워 하지 않아도 모두 상처가 될 것 같다. 그냥 갈 걸 그랬지. 한동안 하던대로 오늘도 피할걸 그랬나 싶어졌다. 갑자기 무슨 변덕이었을까. 곧 생일이어서? 내년에 군대 가니까? 모르겠다. 현준에게 답할 때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어졌다. 

머릿속에 상념이 가득차도 온 신경은 제노의 발소리에만 가 있다. 이것도 꼭 예전 같다. 숙소 안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으면서도, 아침잠 많은 제노가 눈도 뜨지 못하고 제 침대로 찾아올 때까지 쿵쿵대는 발소리를 기다렸었다. 제노는 아마 재민이 이불 속을 떠나기 싫어 그런 줄로 알았을 거다. 그래서 줄기차게 치댔을까. 그렇지만 재민이 전기장판이나 양모이불보다 더 좋아했던 건 방금 잠에서 깨어난 제노였다. 아침에 막 구워낸 토스트처럼 기분좋게 따뜻했었다. 늘 입씨름 하던대로 안든 안기든 그런 날은 제대로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아침은 없다.

 

재민아 허리 아퍼?

 

묻는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그만 일어나려고 했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내리면서도 시선은 슬그머니 비끼고 팔꿈치로 소파를 짚었다. 제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몰라서, 재민의 움직임이 평소보다 느릿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예상 밖으로 제노가 훨씬 빠르게 움직였다. 재민이 고개를 드는 그 잠깐 사이 제노가 몸 위로 올라탔다. 너무 놀라고 순식간에 실린 무게에 막 일으키려던 상체가 무너졌다. 억. 몸끼리 부딪혀 아픈 건 안중에도 없었다. 갑자기 숨이 막혀 정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너,

오기 삼십 분 전에는 연락 하라니까 너는 그걸 안해 매번. 저번처럼 못 보고 그냥 가면 어쩌려고. 나 이제 카톡 잘 본다니까?

 

저번처럼? 카톡? 못본 새 수다쟁이가 된 제노가 연신 떠들었다. 그런데 내용이 죄다 이상했다. 재민은 제노가 말하는 저번이 언제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건 적어도 이 계절이 아니었다. 둘이서만 만난 건 더 오래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도 만났던 것처럼 종알댄다. 카톡은 안한지 오래다. 요즘 들어선 자주 사용하는 메신저가 아니었다. 더구나 제노와는. 헤어지기 한참 전에도 대화내용이 저장되지 않는다는, 해킹되지 않는다는 다른 메신저로 연락했었다. 당연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갑자기 카톡 타령이라니.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말 좀 들으라는 소리지.

이제노.

엉?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떠들던 얼굴을 찾아쥐었다. 그러고보니 머리색이. 캡모자 아래로 비죽 나온 머리색이 남다르다. 얘 언제 이런 머릴 또 했어? 아니 그보다 올라앉은 제노가 마지막 기억보다 지나치게 가뿐했다. 본 지 오래 되었다고는 하나 충격적일 정도의 업데이트다. 볼은 다시 말랑하게 살이 붙었는데 몸은 훨씬 가볍다. 꾸준히 증량한다더니 무게가 왜 이것밖에 안돼. 찬찬히 제노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재민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제노 아닌데.

으엥?

제노 맞는데, 제노가 아니네.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뱉으면서는 꿈인가 싶었다. 제노를 기다리다 연습실 소파에서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된다. 말도 안돼.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제노야, 오늘 몇 일이야?

오늘? 오늘 8월 11일. 

몇 년도.

갑자기 연도까지? 왜애?

말해봐. 오늘 몇 년 몇 월 몇 일인지.

오늘.. 2017년 8월 11일.

 

말도 안되지만 재민의 짐작이 맞았다. 눈 앞의 제노는 2017년의 제노였다. 열 여덟의 여름을 맞이한, 재민의 현재로부터 10년 전의 제노. 

 

 

 

 

 

 

 

 

 

 

 

 

 

 

 

새로 바꾼 식단이 안 맞는 건지 문을 열기 전에 잠시 어지럼증이 일었다. 제노는 안경을 벗어 눈을 꾹꾹 누르면서 문을 밀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시야가 뿌옇다. 연습실 안에 들어서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공기가 차가워서만은 아니었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려도 눈앞의 정경은 그대로다. 

현준의 말대로 재민은 연습실에 있었다. 소파에 늘어진 채로, 제노에게도 익숙한 태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다. 제노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고 다가갔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회사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오는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지만 볼 일이 끝나고도 돌아가지 않고 기다린 이유가 짐작되질 않는다. 재민을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돼서 멀어졌다. 오늘도 여전히 의중을 알 수 없다. 왜 기다렸어? 묻고싶은 말이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지만 꺼내지 못한다. 곧 생일이라는 건 의식하고 싶지 않아도 알았다. 어떻게 잊을까. 어찌되었든 서로의 생일 중에 절반이 넘는 날들을 함께 했다. 그게 생각났으려나. 그래서 기다렸나.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외면하고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할 말이 있는 건 재민일 테니 먼저 입을 열지는 않는다. 턱 끝에 걸쳐두었던 마스크를 올려쓰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셋팅 안된 머리가 쏟아져 자꾸 눈 앞을 어둡게 한다. 침묵이 어색해서 이제는 제 쪽에서 인사를 해야하나 고민했다. 뭐라고 말 좀 하지, 지가 기다려 놓고 입을 안 열어. 답답해질 무렵 갑자기 팔을 쓸어와서 깜짝 놀랐다. 

 

제노 운동했어?

.. 운동이야 맨날 하지.

진짜? 언제부터?

 

잘 알면서 왜 묻는지. 운동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어차피 비슷했고 무엇보다 지금 트레이너가 재민이 추천해준 사람이다. 둘이 술친구여서, 최근까지도 슬쩍슬쩍 제 이야기를 전해듣는 눈치였다. 지금쯤 스펙이 어떻게 되는지 어디를 뭐를 주력으로 하는지 다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자꾸 팔을 조물딱거리는 게 짜증나 홱 돌아보자 곧장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제노가 살짝 움츠리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마스크를 당겨내린다.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움직여서 순간 멈칫했다. 얼굴 보려고 왔는데 마스크 때문에 안 보여. 제노가 미처 뭐라 할 새도 없이 볼을 쓰다듬고 푸스스 웃는다. 뭐하는 짓이냐고 처내기에는 닿았다 떨어진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상해서 돌아보게 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쩍 마른 거 같기도 하고. 화장기 없이 파리한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앳되보였다. 무엇보다 맥을 못 추는 것처럼 보였다. 헤어지던 날에도 이렇게 약해보이진 않았는데. 무슨 안좋은 일 있어? 물어보고 싶은데 동시에 물어도 되나 싶었다. 입을 함부로 뗄 수 없어 가만히 눈만 마주치고 있었다. 언젠가부턴 오프에도 살짝 힘준 것처럼 입성이 말끔했는데 오늘은 아니다. 얇은 흰 티가 헐렁해 보일 정도로 낯이 핼쓱해서는. 진짜 안좋은 일이 있나. 걱정되기 시작하는데 아무 말 없이 제노의 얼굴을 뜯어보던 재민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제노야. 갑자기 얼굴을 더듬더듬 짚으며 묻는다. 근데 너 뺨에 점은 어디갔어? 눈썹은, 눈썹 바꿨어? 안경 새로 했네. 손끝이 가볍게 여기저기 헤매다 코를 꼬집는다.

 

너 제노 아니지.

..

우리 제노 맞아?

 

역정을 내려다 실로 오랜만에 들은 호칭에 말았다. 하도 들어서 아무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우리 제노라 불러주는 게 좋아서. 별 거 아니었지만 재민이 주는 애정은 거의 이런 식이었다. 소소한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일상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들 듯이. 

한때는 그것만으로도 흠뻑 사랑받는 느낌에 뿌듯했다. 그게 나중에 부메랑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오래 길들여져 하나하나 거둬갈 때마다 사무치게 깨달아졌다. 그래서 전부 다 사라지기 전에 헤어지자고 했다. 진짜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걸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섣부르다고도 생각했었는데, 재민은 제노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그래, 그러자. 다섯 글자로 답하고 자리를 떴다. 헤어지자고 말해주길 내내 기다린 사람처럼. 이별을 고한 건 저였지만 차인 기분이었다. 

제 턱을 가벼이 쥐고 이리저리 살피는 재민을 말끄러미 본다. 그것도 한참 전의 일이건만 재민은 여전히 제노의 평정을 무너뜨릴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점을 인정하기 싫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체 하게 됐다. 

 

신기하다.

..

너 나이 먹으면 이럴 거 같았거든. 얼굴이 딱 이렇게 될 거 같았어.

.. 뭐?

생각한 거랑 너무 비슷해서 놀랍네. 다른 부분은 그거대로 좀 놀랍고.

뭔 소리야.

너 서른 살쯤 됐나?

어디 아퍼? 헛소리 좀 그만해.

제노야, 나 몇 살 같아?

 

내버려두니 한도끝도 없었다. 건네오는 말들이 대체 무슨 흐름인지 알 수 없어 잠자코 답했다. 네가 몇 살이긴, 나랑 동갑이니까 스물여덟이지. 그 말에 재민이 픽 웃어버린다. 기가 차다는 웃음이어서 의아했다. 왜 웃어. 제노가 물었다. 재민이 한 템포 느리게 답한다. 

 

나 스물 여덟 아닌데. 아직 열 여덟 생일도 안 지났어. 

 

 

 

 

 

 

 

 

 

 

 

 

 

 

 

이거 꿈이야?

 

재민이 물을 말을 멍하니 중얼거리던 제노가 자기 뺨을 두드렸다. 살살 두드리는 게 아니라 찰싹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쳐서 얼른 손을 잡아내렸다. 아퍼어. 그래도 늦었는지 울상을 하고 재민을 본다. 아프기도 하겠지, 힘 조절을 못해서. 

얘는 왜 어려운 방법으로 확인하려 들지. 문득 손쉬운 방법을 떠올린 재민이 말랑한 볼을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키스해도 돼?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아래에 깔려있는 재민의 목을 조른다. 시늉만은 아니라 캑켁거리며 웃었다. 이것도 오랜만이네. 지금은 키스 소리에도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지만 몇 년 뒤에는 섹스하다가 눈 하나 깜짝않고 목도 조른다. 단순히 쾌락 때문만은 아니고, 진짜 미워서 그랬던 것도 안다. 그렇지만 눈 앞의 열 여덟살 짜리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 아마 네가 날 그 정도로 미워하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걸 상상도 못하겠지. 

재민은 팔을 뻗어 제노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부딪히고 이내 혀가 엉키면 지독하게 생생해서 꿈 같지 않았다. 뒷목을 쥔 손에 힘을 주고 고개를 틀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변함없이 너무 좋은 바람에 좀 서글퍼졌다. 셔츠자락을 바짝 잡아당기는 게 느껴질 때쯤 입을 뗐다. 헥헥거리는 소리를 감추지도 않고 눈이 반쯤 풀려 몽롱하게 재민을 본다. 

 

꿈 아닌가봐.

그치. 키스해 보니까 꿈 아닌 거 같지.

아니, 너 엄청 잘해서.

뭐?

지금은 이렇게 못 하니까.

 

깜찍한 말에 웃음이 터졌다. 아 이제노 골때려. 웃다가 정색을 하게 된다. 너 속으로 나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했어?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따져묻는 말에 입가를 손등으로 닦아주며 히히 웃기만 했다. 와. 뒤늦은 배신감에 치를 떨자 달래듯이 말한다. 못 한다는 게 아니라아, 지금, 그러니까 아저씨 재민이가 더 잘 한다고오. 일부러 말끝 늘리는 거지 너. 귀여워하는 거 다 알고서. 불리하니까 귀여운 걸로 때우려 드는 거지 지금. 

예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새로 보였다. 재민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열 여덟 제노는 충분히 깜찍하고 귀여웠는데 그것보다도 더 깜찍하고 귀엽다. 동갑이 이게 안 좋구나. 지금은 투명하게 다 보이는 게 그때에는 안 보였다. 이따금 제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헤아릴 수 없어 답답했다. 무지에서 비롯된 불안이 골을 만들기도 했다. 다툼이 시작되는 계기는 대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게 태반이었다. 내가 지금처럼 너보다 훨씬 연상이어서, 그래서 좀더 알고 좀더 너그러웠다면 우리가 덜 싸웠을까? 헤어지지도 않았을까? 해맑은 얼굴에 대고는 묻지 못할 말이 많다. 

 

나도 잘해?

응?

스물 여덟 이제노도 잘 하냐고오.

뭘 잘해?

 

다 알면서 모르는 체 했더니 표정이 샐쭉해졌다.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거다. 알아서 넘어가 줄 수도 있었지만 스물 여덟 나재민은 인내심이 만렙을 찍었기 때문에 잘 참았다. 이만치 혹독하게 단련시킨 건 어차피 제노였다. 뭘 물어보는 건데. 재차 묻자 조그만 목소리로 답해온다. 키스, 잘 하냐고. 귀여워서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단속하며 여상히 답했다. 너는 늘 잘해. 나 맨날 뿅가잖아. 쑥쓰러운지 입술을 감쳐물고 배시시 웃는다. 솔직한 게 탈이라 으레 해줄 법한 너도 잘해 소리는 안 나왔다. 참 한결 같아서 웃겼다. 그냥 좀 해 주지. 항상 타박처럼 하던 생각도 간만에 떠오른다. 제노한테 서운한 게 많던 시절, 참다 지치면 생각했었다. 쟤는 왜 저렇게 고집이 셀까, 나같음 그냥 해주겠다. 사랑하면 그냥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말 그대로, 재민은 제노가 헤어지잘 때도 토를 달지 않고 헤어져줬다.

 

근데 스물 여덟 이제노는 나한테 키스 안해줘서 잘 모르겠다, 잘 하는지.

왜?

 

내가 너한테 키스를 왜 안해줘? 눈을 둥글게 키우고 물어오면 곧이곧대로 답할 수가 없었다. 두루뭉술 말했으나 알아들을 법도 한데. 눈치가 없기도 하고,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는 거기도 하고. 믿음에 부응하지 못한 게 미안해 솔직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많아서, 벌 주나봐. 무구하고 평안한 마음을 어지럽히기 싫어 어물쩡 넘어간다. 열 여덟 제노에게 우리가 앞으로도 지나온만큼 긴 시간동안 사랑을 하다, 어느 날부터는 영 모르는 사람들처럼 살게 된다는 소릴 하긴 싫었다. 아직은 몰라도 된다. 몰라야 그때처럼 예쁘게 사랑을 하지. 열 여덟의 제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열 여덟의 자신이 부러웠다. 부럽고 질투가 나서 자꾸 만지작거렸다. 엄청 싫어할 텐데. 다 같은 사람이고 결국은 전부 저지만 재민은 알았다. 이렇게 맘대로 주무르는 거 나재민이 알면 싫어하겠지. 스스로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우스웠다. 

 

움.. 민망해서 그런 걸껄.

그래?

응. 너 벌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니가 어떻게 알아.

내가 본인인데 너보다야 잘 알지 않을까?

정말?

못 믿겠으면 한 번 물어봐봐. 

뭐라고 물어봐.

왜 키스 안해주냐고.

.. 그런 걸 어떻게 물어.

너는 맨날 그러더라.

뭐가.

얼굴에 철판 깐 것처럼 뻔뻔하다가도 이상한 데서 부끄럼타고. 내가 해달라는 건 잘 해주지만 아무 말 안하면 또 가만 있고.

기다리면 네가 알아서 말하니까 두는 거지. 그렇게 안하면 너 속에 들은 얘기 잘 안하잖아.

말하기 힘들 때도 있어. 

그랬어?

응. 내가 힘들어서 말 안해 버려도 가만 있잖어, 너.

이를테면?

 

제노가 한숨을 쉬며 입을 꾹 다문다. 재민은 듣지 않아도 답을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헤어지던 날. 그런가. 한 번쯤 물어봤어야 했나, 왜 그러는지. 제노는 한 번 아니면 아닌 애니까, 재민도 구차하게 붙잡지 않았다. 한 번 아니게 될 때까지 십 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괜히 엉겨붙다 정 떨어지면 어떡해. 그러면 정말 다시는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이제노 칼 같은 거 누구보다 잘 알아서. 겁나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해 재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덤덤해보이던 어른 제노도 실은 더 할 말이 있었을까. 물어나 볼걸 그랬나. 상념에 빠지려는데 재민의 볼을 잡아 늘린 어린 제노가 투정을 쏟아냈다.

 

지금도 내가 아쉬운 소리 먼저 해야 연락하잖아.

..

그거 안 쉬워 재민아. 나 원래 그런 성격도 아니고. 그냥 너도 힘든 거 아니까 참는데, 가끔은 너가 먼저 얘기해주면 좋겠어.

.. 바쁜 줄 아니까 안했지.

어, 너 그렇게 생각할 줄 알고 나도 아무 말 안해. 그렇지만 너가 연락하면 어떻게든 시간 만들어서 나오잖아, 지금처럼.

나 때문에 괜히 무리할까봐 그랬어. 보는 내 속도 안 편하고. 

나 보기 싫어?

어?

너는 재민이 아니고 아저씨니까 그냥 물어볼께. 다 지나간 일이니까 솔직하게 대답해봐. 너 없이 활동하는 거 보기 싫어? 연락 자주 하지 말까?

 

보이는대로 단순하기만 한 성정인 줄 알면 큰코 다친다. 허허 웃으며 넘어가는 게 다반사지만 가끔은 안으로 생각이 파고드는 타입이었다. 지금도 혼자 곱씹은 생각들이 고치처럼 제노를 둘둘 말고 있는 게 보였다. 절대 울지는 않는데, 그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재민만이 아는 표정. 모두에게 익숙한 웃는 얼굴 아래로 숨기지만 다르다. 울음을 삼키느라 큰 숨을 천천히 쉬고, 시선을 피한다. 지금은 그나마 표시가 나는 편이고, 나중에는 이마저도 티를 안 내게 됐다. 그래도 재민은 차근차근 잘 따라갔었다. 울고싶어 하는 제노를 미리 눈치채고 다독일 수 있는 건 세상에 저 뿐이니까.

 

왜 싫어 네가. 이건 전적으로 내 문제야. 너가 싫을 이유가 뭐 있어. 

보기만 싫어?

보기도 안 싫어.

아저씨 말고 재민이도 안 싫어하는 거 맞아? 확실해?

안 싫었어, 계속. 그런 소리하면 혼나.

 

혼낸다는 게 말 뿐은 아니어서, 올라앉은 엉덩이를 팡 소리나게 쳤다. 아프다고 웅얼대는 듯 하더니 그마저도 이내 그치고 묵묵히 내려다본다. 이미 다 보고 지나온 얼굴인데도 새로웠다. 이렇게 어렸구나. 그때는 재민도 같이 어려 몰랐다. 

같이 연습하고 같이 데뷔하면서 쭉 함께였다. 학교에서마저 같은 반 짝꿍으로 이래저래 떨어질 새가 없었다. 계속 그럴줄 알았다. 하루아침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연말 시상식 스케줄부터 빠지기 시작해서 일 년이 넘게 활동을 못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은 괴로웠다. 통으로 쉬었던 그 해와 복귀한 그 이듬해까지 가장 날이 서있었다. 이전까지 몸만 자라고 있었던 것에 비해 그때 사춘기가 제대로 왔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그랬다. 그때는 날마다 심신이 고달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다. 스트레스로 들쭉날쭉한 기분을 감출 수 있는 데까지 감추려 애쓰긴 했다. 그런데 제노 앞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그 앞에서마저 전부 다 괜찮은 양 가장하고 싶지 않았다. 믿고 의지하니까. 당연히 재민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상태에 제일 많이 노출됐다. 재민은 제노에게 제일 다정하고 제노에게 제일 야박했다. 다른 멤버들이 하면 아무렇지 않을 일들이 죄다 크게 다가왔다. 크게 고맙고 크게 서운했다. 다른 멤버들을 상대로라면 알아서 잘 갈무리했을 감정도 그대로 내비치곤 했다. 응석이기도 하고 투정이기도 했다. 너는 나 사랑하잖아. 너도 나한테 이럴 때 있잖아. 아슬아슬할 때도 많았지만 거의 잘 무마됐다. 제노는 묵묵히 저 할 일을 잘하고 재민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바쁘고 힘든 중에도 재민이 회사에 나가면 밥 한 끼라도 꼭 같이 먹고 생전 나가 돌아다니는 걸 꺼리던 애가 오 분 십 분이라도 짬내서 같이 걸었다. 그때는 그마저도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지만 제노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고마웠다. 아쉬운 거지 서운하거나 야속한 게 아니었다. 보기 싫거나 꺼려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 같이 연습하고 같이 활동하고, 얼마 전까지 당연하던 일들을 갑자기 못하게 돼서 그게 슬프고 힘들었을 뿐.

 

근데 왜 나 잘 모르겠지.

뭐가.

 

고개를 숙이더니 재민의 위로 폭 엎드렸다. 빈틈 없이 맞붙어 익숙한 샴푸냄새가 코 밑을 간질인다. 재민은 습관처럼 제노의 등을 토닥이며 기다렸다. 드물게 말문이 터졌으니 시간을 충분히 주면 알아서 다 말할 거였다. 

 

너 많이 힘든데 내가 이런 생각하면 안되는 거 아는데에.

응.

네가 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요즘은.

 

이 말을 하기 어려워 얼굴도 못 보고 안겨 있는 거다. 어린 재민한테는 입도 못 뗄 소리를 해보고, 애정을 확인받고 안심하고 싶어서. 나 좋아해? 얼마나 좋아? 철부지 같은 소리로 들릴까봐 심란한 지금의 제 남자친구한테는 내색도 못하고, 어른이 된 재민의 앞에서야 푸념을 한다. 

제노가 이런 투정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재민이 표현을 많이 하기도 했고, 좀처럼 불안할 일을 만들지 않았다. 사랑 받으면 받을수록 예쁜 애니까, 안그래도 넘치게 많은 사랑을 충분히 쏟아부었다. 그런데도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면 어지간히 부대꼈다는 얘기다. 

당사자였던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예 편할 수는 없었을 거다. 어찌되었든 제노도 열 여덟 밖에 안됐는데,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을 거고. 일하며 제 앞가림 하기도 벅찬데 이따금 저보다 더 힘들 옆사람 걱정까지 해야했을 테니까. 

쓸쓸하고 그리운데 그 와중에 상대에게서 되돌려받는 애정은 한참 작게 느껴지고. 순간순간 벽 앞에 선 기분이 들었겠지. 나만 좋아하는 것 같고, 나한테만 이게 큰일인 것 같고. 털어놓고 말도 못 하고. 결국은 혼자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재민도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았다. 각자 스스로를 돌보느라 바빠서 본의 아니게 무심한 순간들이 있었다. 서로 번갈아가며 그랬다. 길었던 연애에 시시때때로 찾아오던 고비, 아마도 헤어지기 전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 될 위기의 시작이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서로 잘 이해하고 버텼다. 그때는 조금만 잘 참고 기다리면 다시 전처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분명히 있었다. 마지막 즈음에는 그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같은 꿈을 꾸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재민도 알 수 없었다. 

재민은 잠자코 제노의 등을 끌어안았다. 힘주어 꽉 끌어안고, 진심을 담아 말한다.

 

좋아해.

..

제노야 좋아해.

.. 알았어.

사랑해.

알았다구.

알긴 뭘 알아. 너 하나도 몰라, 이 아가야.

재민아 숨막혀.

너가 만나러 온 그 재민이도 다 몰라, 내가 이제노 얼마나 사랑하는지. 애들이 뭘 알어.

아저씨 숨 막힌다고요!

 

차인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미련 못 끊고 혼자 청승 떨 정도로 사랑한다고. 스물 여덟 이제노가 질려할까봐 매달리지도 못하고 떨구는대로 떨궈져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고. 열 여덟 제노한테는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팔을 풀었다.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고? 말이 돼?

못 믿으면 어떡해. 사실인데.

 

재민은 놀라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에 안절부절 못하는 건 제노 뿐이다. 쟤는 왜 저렇게 태연해. 연신 흘깃거리자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돌려 앉힌다. 

 

제대로 봐봐. 내가 스물 여덟으로 보이나. 

 

스물 여덟의 재민이 아닌거 같긴 했다. 열 네살  이래로 쭉 봐온 얼굴이지만 어딘가 달랐다. 미묘하게 선이 여리고 틀이 좁다. 갑자기 혼자만 시계태엽을 거꾸로 감은 것처럼 맑은 낯을 한 재민이 낯설어, 제노는 주섬주섬 마스크를 올려썼다.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 민낯이 말이 아닐 거였다. 슬쩍 인상을 구긴 재민이 다시 손을 뻗어와 마스크를 잡아내린다. 얼굴 보러 왔다니까 왜 자꾸 가려. 맨날 보고 질리도록 봤으면서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다. 잠자리에서는 더 집요했다. 베개 치워. 제노야 돌아봐봐. 나 좀 봐. 정신없어 죽겠는데 끈질기게 찾았다. 그래서 거울 좋아했지, 이 변태놈아. 그 재민은 지금 눈 앞의 재민이 아니지만 될성부른 떡잎이다. 얼굴을 본다 어쩐다 해도 진득한 시선의 끝자락은 뻔했다. 제노는 부러 입술을 꾹꾹 말아물며 피했다. 의식도 못하고 침을 삼킨 재민의 시선이 간신히 비껴간다. 얘가 이렇게 어리숙했나. 남 꼬시려고 작정하고 태어난 애 같았는데 지금 보니 수작이 다 보인다. 어쩌다 넘어갔지.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제노의 무릎께를 매만졌다. 만지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어린 재민이라 생각하니 내버려 두게 된다. 

 

스타일이 좀 바뀌었네.

이렇게 입으면 춤선이 잘 보이더라고.

그..

몸선이 잘 보여서 맘에 든다고?

아.. 내가 말했나보네.

 

말을 가로채니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비슷한 복장을 할 때마다 그런 말을 해서 잊을 수도 없다.  처음 들었을 때의 오묘한 기분이 다시 떠오른다. 

 

연습하러 왔어?

어.

혼자?

 

고개를 끄덕이다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어 가만히 재민을 쳐다봤다. 제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덩달아 끄덕인다. 그렇구나.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퍽 애달팠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어린 재민의 얼굴을 한 이 꼬맹이가 열 여덟 생일도 아직 안 지났다고 말했었다. 그렇구나. 이번에는 제노가 혼자 중얼거렸다. 재민에게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속으로만 되뇌인다. 너 되게 힘들 때구나. 최악의 여름을 보내고 있는 중이구나. 재민이 곁에 없어서 제노도 힘들었던 해다. 

이듬해 재민이 돌아오고 나서 형들과 팬들이 그랬다. 제노 어른이 됐던 게 아니라 그냥 기운이 없었던 거구나. 일년 넘게 계속 그 상태였다. 느리고 조용했댔다. 형들이나 팬들이 말 안해줬어도 스스로 잘 알았다. 떨어져 본 적이 없어서 외롭고 쓸쓸하고 보고싶고. 다들 곁에 있는데도 마음 한 구석이 휑했다. 즐겁고 좋은 순간들이 지나고 나면 재민이 생각났다. 나 얘 되게 좋아하는구나. 그전에는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줄 몰랐다. 늘 손 닿는 곳에 있다가 없어지니 뼈저리게 느꼈다. 옆에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 돌아오고 나서 다시 쌩쌩해졌다. 전보다 잘 웃고, 잘 까불고. 편안해져 그랬겠지. 

요즘의 저는 어땠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나 다시 느려졌나? 전보다 덜 웃고 더 조용한가. 재민이 다시 무릎을 꽉 쥐어와 정신이 들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참 많은 눈을 하고 있다. 어떡하지. 앞으로의 일을 어디까지 얘기해도 될지 잠시 고민이 된다. 뭐가 잘못 되거나 그러진 않겠지? 

앞으로 뭐가 어떻게 잘못되든 사실 상관없다. 제노에게 제일 중요한 건 눈 앞의 이 아이라서. 망설이지 않고 손을 잡았다. 까칠하게 말라 마디가 도드라졌지만 손끝은 뭉툭하니 못생겼다. 사실 제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짐없이 잘생긴 와중에 조금 못난 재민의 손을 제일 좋아했다. 재민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 남들이 가장 덜 좋아해줄 것 같은 부분이라서. 여기는 내꺼 해도 아무도 뭐라 안할 거 같아서. 이 손을 잡는 것도 좋아했고 깨무는 것도 좋아했다. 몸을 더듬거나 만져올 때가 제일 좋기는 했지.

 

재민아.

응.

괜찮아.

..

다 괜찮아.

.. 응.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도 있지만 거기서 그쳤다. 제노가 어떻게 말하든 재민이 직접 겪고나야 믿어질 것이다. 지금은 그냥, 잡을 지푸라기가 필요한 것 뿐이니까. 제노도 알고있다. 제노가 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재민은 스스로를 믿고 의지해 이 힘든 시기를 잘 넘기고 괜찮아질 거라는 걸. 그래도 한 마디쯤은 해주고 싶었다. 믿고 의지할 무언가가 하나 더 있으면 그게 낫겠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노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까. 그때는 한다고 했지만 과연 위안이 됐을지 모르겠다. 어린 제노가 재민을 위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적었다. 받는 것만 익숙하고 주는 건 서툴어 더했다. 딱히 좋은 친구도 남자친구도 아니었을 것 같다. 이후로도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을 거고. 

 

네가 괜찮다고 하니까, 뭐.

.. 응.

괜찮겠지, 괜찮아지겠지.

 

말을 마친 재민이 관자놀이께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고개를 떨궜다. 찬 공기가 내려앉은 연습실이 조용해진다. 키도 몸무게도 같았지만 저보다는 늘 커보이던 재민이 작아졌다. 옆으로 다가가 감싸듯 끌어안았다.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있던 재민의 껍데기가 한꺼풀 벗겨져 여린 속이 드러난다. 아무리 어른인 체 굴어도 결국은 열 여덟도 못 미친 소년일 뿐이라서, 여전히 불완전하고 연약하다. 숨기지도 가리지도 못하니 그보다 어른인 제노가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재민 곁에, 동갑내기 소년이 아니라 스물 여덟 먹은 지금의 제가 있어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처럼 괜찮다는 말 한 마디로 기꺼이 짐을 덜어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건데. 그때의 제노가 하는 괜찮다는 말은 이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그때의 제노 또한 불완전하고 연약해서 잘 돌봐주지 못했다. 제 외로움과 쓸쓸함이 너무 커서, 늘 받던 애정이 고파서 보채게 됐다. 틈나는대로 연락하고 만나도 모자라니까. 숙소고 연습실이고 어디서나 오래 있을 수가 없어 몸 붙일 시간도 짧았다. 떨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울상이 되어 되려 재민이 걱정을 했었다. 제노는 감추질 못하고 재민은 눈치가 빨라 자꾸 들켰다. 걱정을 덜어줘도 모자랄 판에 얹어주기만 했다. 그걸 두 번 겪을 자신이 없어 헤어졌다. 

이번에는 막연하게나마 재민이 돌아올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예 다른 진로를 택했으니까. 이제부터는 갈 길이 다를 테니까. 점점 멀어질수록 다시 뼈저리게 느꼈다. 나 얘 진짜 사랑하는구나. 이제 더는 어리지도 않고 서툴러서도 안됐다. 그렇지만 재민의 앞에서는 언제나 열 네살, 열 여덟, 스물, 스물 하나, 그 정도 밖에는 안되는 것 같았다. 자라지를 않는다. 재민은 어느새 다 자라 제 갈 길을 정하고 걸음을 뗀 이후였는데, 그걸 지켜보는 저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연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 없었다. 자신 없다고 포기하는 것부터가 이미 어리고 어리석었다. 재민과 관련된 일에서만 그랬다.

품 안에서 한참 숨을 고르던 재민이 문득 제노의 팔을 잡고 고개를 들었다. 재민도 어지간해선 울지 않는다. 뭉클한 순간에도 울기보다는 웃으려고 하는 타입이라. 그게 더 어울리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런 순간에는 어쩔 수 없는지, 기다란 속눈썹에 물기가 엉겨 붙어있다. 

울음기를 참느라 천천히 깜박이는 눈꺼풀을 바라보다 제노가 먼저 눈을 감았다. 급하게 입술을 물어와 기꺼이 잇새를 벌렸다. 축축한 숨이 불어닥친다. 뒤죽박죽 밀고 들어오는 혀를 받아내느라 뒷목을 그러안게 됐다. 뭐가 이렇게 급할까. 길게 자라 목뒤까지 덮은 머리 끝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순순히 달래지는 것처럼 움직임이 느려지다가, 갑자기 다시 거칠어지더니 순식간에 뒤로 밀어 눕혔다. 가슴이 꽉 눌리도록 무게를 실어와 숨이 막혔다. 흩어진 머리칼을 쥐었다가, 옷 위를 더듬다가, 종내에는 벨트를 끄르고 웃옷을 들춰 손이 들어왔다. 맨가슴을 몇 번이나 쥐었다가 놓고 허리께를 쓸어내리며 잡아먹을 듯이 입을 맞춘다. 으응. 코 끝으로 신음이 새고 재민의 무릎이 다리 사이에 닿아서야 정신이 들었다. 밑으로 내려가는 손을 붙잡았다. 아랑곳 않고 기어이 부푼 아래를 쥔다. 아. 자극에 제노의 고개가 절로 젖혀지면서 맞붙어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힘줄이 올라온 재민의 팔을 두 손으로 잡아 붙들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재민, 재민아. 그만해. 그만. 

한동안 실랑이를 하다 결국 재민이 손을 풀었다. 저 어린 애랑 여기서 할 뻔 했다. 미치겠다 진짜. 속수무책으로 옷이 벗겨진 데에 자괴감이 든다. 여전히 숨을 몰아쉬던 재민이 제노의 위로 풀썩 몸을 뉘였다. 열이 올라 뜨끈해진 뺨을 붙이고 꽉 끌어안는다. 일을 치르기 직전까지 갔으니 맞붙은 아래가 여실히 느껴졌다. 

 

나재민이 잘해줘?

 

한참 조용하더니 자기 자신을 남처럼 부르며 물었다. 말투가 너무 태연해 어이가 없다. 참지 못하고 소리내 웃었다. 웃는 소리에 재민이 상체를 일으킨다. 드디어 한 번을 웃네. 만족스럽다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제노야. 진지한 얼굴의 재민이 제노의 이름을 부른다. 대답은 않고 물끄러미 올려다 봤다. 재민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왜. 그러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뜸을 들였다. 습관인 걸 알아 씹은 자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못하게 했다. 말로 하지말라 해봤자 듣지 않는다. 한참 만지다 떼어내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뭐 잘못했어?

 

엉뚱한 질문에 갈피를 못잡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야. 소리내어 묻지 않아도 눈빛을 읽은 재민이 다시 입을 연다. 쭉 망설이던 말이었는지 설명에 거침이 없었다.

 

너 아까부터 화났을 때 말투 쓰잖아.

내가? 언제?

계속. 처음부터 방금 전까지.

그런 말투가 있어?

있어. 말 짤막하게 하는 거. 맨날 말끝 늘어뜨리다가 화나면 정없게 싹 다듬어서 깔끔하게 말하는 거. 

잘 모르겠는데.

안 쳐다보고 네 얼굴 안 보여주고 총체적으로 고약하게 구는 거 있어. 지금 딱 나왔어.

모르겠다니까. 첨 듣는 소리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아 어차피.

화 안났어.

거짓말.

거짓말을 왜 해, 내가.

진짜 화났을 때는 화났다고 말도 안하지 원래.

무슨 소리야.

한 번을 안 웃잖아.

..

나 보고도 한 번을 안 웃다가 헛소리 하니까 이제야 웃잖아. 

 

눈치는 타고나는 건가 보다. 열 여덟 나재민 또한 스물 여덟 나재민 못지 않게 눈치가 빨랐다. 좀 모르면 좋잖아. 뭘 그렇게 일일이 알아채 피곤하게. 그러다 먼저 지치면 어쩌려고. 제노는 늘 재민이 좀 느슨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민한 것도 정도껏이지, 애인한테까지 촉을 세우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너무 기울어 미안했다. 제노가 아무리 노력해도 둔한 성미나 맹한 눈치는 고쳐지지 않았다. 혼자서 다 지나간 다음에야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재민이 간혹 답답해 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미안하고 또 걱정스러웠다. 그나마 옆에 계속 붙어있어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장단을 맞출 수가 있는데. 못보는 날들이 많아지니 따라가기 힘들었다. 재민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제노 혼자 위축이 됐다. 성격이 딴판인 거야 처음부터 알았다. 죽고 못살게 좋고 같이 자라다시피 하면서 맞춰진 거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달라지는데, 계속해서 생각이 달라지고 환경이 바뀌어가니 맞던 것도 안 맞게 되고 새로 맞출 새도 없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불안을 부추기는 요소가 되긴 했다. 

그렇지만 헤어질 때는 그렇게 좋던 눈치도 아무 소용 없었는지. 재민은 한 번을 안 붙잡았다. 헤어지기 싫다고, 헤어지지 말자고 했으면 들어줬을 건데. 이유도 묻지 않았다.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여 상처가 됐다. 애저녁에 치우고 싶어하던 걸 언제나처럼 눈치 없이 매달려 있었던 건가 싶었다. 정말은 헤어지고 싶지 않은 제 속내를 재민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생각하면 속이 쓰렸다. 하루아침에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치고 너무 깔끔하게 헤어져줘서, 오히려 통보한 제노가 깔끔해지지 않았다. 나쁜 놈아. 의논도 없이 재계약 안 하고, 회사 옮기고. 앞으로 우리 어떡하자는 말도 안하고. 내가 그랬어봐, 펄쩍펄쩍 뛰고 난리쳤을 놈이 나는 바보 만들어. 누가 가지 말라고 붙잡는대? 지 인생이니 결국 지 뜻대로 해야한다는 건 제노도 알았다. 기꺼이 그래라 했다. 그냥 배제된 느낌이 싫었던 거였다. 앞으로 많은 날들에 영향을 끼칠 중대한 결정인데 이런 식이면. 평소에는 별 중요하지도 않은 얘기까지 미주알 고주알이면서 결정적일 때는 입 다물고 지 멋대로. 욱하는 마음에 눈 앞의 어린 재민에게 다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너 나중에 절대 그러지 말라고 미리 으름장을 놓을까 싶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아무 것도 잘못한 거 없어.

근데 왜 화나.

화 안났다니까.

말 안해줄 거구나. 이제노 또 고집 부린다, 어휴.

 

그렇지만 너는 내가 화난 그 나재민이 아니니까. 너는 내가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재민이니까. 제노가 못다한 말을 꼭꼭 참는 사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재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나 걷어차지 말고.

..

화난다고 치우지 말라고. 너 아니면 갈 데 없어, 나.

 

재민이 남들은 모르는 제노의 화난 말투를 안다면 제노는 남들이 모르는 재민의 불안한 얼굴을 알았다. 눈치 진짜 빨라. 아마 어린 재민이도 어렴풋하게 알아차린 모양이다. 네가 생각할 땐 미래의 나재민이 차였을 거 같아? 아닌데. 나는 내가 차인 거 같은데. 순간 울컥했다.

 

너가 왜 갈 데가 없어. 너무 많아 탈이지.

어?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애 앞에서 주책이 이만저만 아니다. 열 여덟살 짜리랑 같이 있으니 같이 열 여덟살 노릇을 하려 든다. 창피해서 이만 피하고 싶었다. 재민이 몸을 비켜주기만 하면.

 

나 갈 데 없는데 진짜.

..

제노야, 너 있는 데가 내 집이야. 평생 너 있어야 돼, 나. 

..

설마 우리 아직도 같이 안 살아?

 

 

 

 

 

 

 

 

 

 

 

 

 

 

 

재민이 힘 엄청 세졌다아. 몸을 일으키며 제노가 중얼거린다. 아직 늦은 오후가 되기 전이라 그런지 눈이며 코가 소복하게 부어 찐빵 같다. 귀여워, 내 강아지. 그때도 이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또 감회가 달랐다. 이렇게 어린 거랑 별 짓 다했단 말이지. 똑같이 어렸으니 상관없지만 어쩐지 양심이 콕콕 찔렸다. 

 

.. 아저씨.

어.

설마 지금 세운 거..?

뭐 그렇게 됐네.

아저씨 진짜 양심 없다. 지금 우리 열 살 차이 난다고요.

니가 계속 올라가 있잖아. 불가항력이야. 나는 죄없어.

재민이 어려운 말 쓰는 변태아저씨가 된 거야? 세우면서 미성년자 핑계 대는 비겁한 변태아저씨?

아저씨 소리 계속 해봐. 신선하고 좋다.

그러니까 진짜 아저씨 같잖어..

진짜 아저씨 맞지. 열 살 차이라며.

나 우리 재민이한테 갈래, 아저씨 무서워.

걔는 안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는 게 착각인 줄 알아라,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우뚱 하더니 금세 웃어보인다. 웃는 얼굴에 약한 줄은 알고 수를 쓰는 거지 지금. 옷은 헐레벌레한 추리닝 입고 와서, 위에 올라타기나 하고. 가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앙큼하게 계속 고쳐 앉으면서 움직이고. 건드리지도 못하는데 꼬시는 거야 뭐야. 이럼 안된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력하게 들어 참는 거지 뒤집어도 열 번은 더 뒤집었을 상황이다. 

 

이거 꿈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저씨 만나서 좋다. 

되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거 알지, 제노야.

아니아니, 그거 아니고.

어 알지. 나도 장난.

그냥 잘 지내보여서. 재민이 쭉 잘 지낸 것 같아서.

.. 그래서 좋아?

응. 너 잘 지냈으면 돼. 

왜 네 이야기는 안 물어봐? 스물 여덟 이제노는 안 궁금해?

나? 에이, 미리 알면 재미없지. 그냥 모를래. 말해주지마. 내가 알아서 근사한 스물 여덟 될래. 

.. 그래, 그럼. 

그리고 어차피..

 

말끝을 흐리더니 몸을 낮춰 재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까 그래가지구 안심됐어. 그러고는 재민의 뺨에다 살짝 입술을 붙였다 뗀다. 볼이 발그레진 채로 계속 눈이 보이지 않게 웃었다. 키스 엄청 좋았나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할걸. 더 찐하게 해줄걸. 다시는 못할 수도 있는데. 부질 없는 생각을 하며 손을 뻗어 제노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주인에게 예쁨받는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손바닥에 얼굴을 부빈다. 웃는 얼굴이 말도 못하게 사랑스럽다. 

 

나는 이제 내 재민이 찾으러 갈래.

그래.

아저씨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응. 나는 우리 제노 기다려야지.

 

훌쩍 몸을 일으키는 걸 따라 재민도 일어섰다. 눌려있던 머리를 털고 내미는 손을 잡아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여튼 손 잡는 거 좋아해, 이제노. 익숙하게 맞잡고 나면 기분이 알싸했다. 손잡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면 어쩌지. 한 번 잡으니 놓기가 싫다. 깍지를 껴 세게 쥐는 사이 어느새 문 앞이었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유리문 밖의 풍경은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제노가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다 끝일 것만 같은 기분. 이게 실제인지 꿈인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열 여덟의 제노가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는 못 만날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또다시 제노와 헤어지는 기분이 든다. 아쉬워서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노야.

응?

그 멍청이가 속 썩이는 날은 앞으로도 있을 거야.

재민이 속 안 썩이는데.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잡아떼고 아닌 척 좀 하지마, 응? 속터져 가끔.

..

그래도 걔는 너밖에 없어. 아무리 속상해도 그거 잊어버리지마. 

네에.

 

해실해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 보았을 때 느낀 제노의 불안은 거의 가라앉은 듯 했다. 이쯤이면 열 여덟 나재민한테는 충분히 할만큼 해준 것 같았다. 그러면 안된다는 건 아는데, 지금의 저를 위해서도 뭔가 해야할 것 같았다.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먹먹해서. 

제노가 문을 열기 시작하면, 갑자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 앞이 부옇게 환하다. 열 여덟의 제노가 나가려다 말고 몸을 반쯤 돌려 재민을 쳐다봤다. 안녕. 입모양으로 인사를 하고 웃어보인다. 영영 떠나는 게 아니고 열 여덟의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뿐인데도 애틋해 가슴이 아프다. 제노야. 가지말라는 소리는 차마 못 한 재민이 스물 여덟의 자신을 위해 작게 덧붙였다.

 

제노야. 

나 버리지마.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사방으로 뻗치던 빛이 삽시간에 수그러들었다. 멍하니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는데 안경에 검정마스크를 쓴 제노가 서 있었다. 꿈이었나. 환상이었나. 뭐지. 열 여덟의 제노를 만났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 있으면 제노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사를 건넬 엄두도 못 내고 이제는 진짜 제노를 만나 다 깨져버릴 달콤한 순간들을 곱씹었다. 아쉬워서 그렇다. 저한테 다정하고 잘 웃어주던 제노가 아쉬워서. 딱 붙는 까만 티에 군데군데 찢어진 블랙진을 입고, 검은 생머리를 쓸어넘기며 재민을 본체만체 지나쳐가던 제노의 워커소리가 문득 멈췄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까이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영문을 모르고 시키는대로 다가갔다. 원래도 말을 잘 들었고 방금 전까지 어린 제노와 있었어서 그런지 죄다 들어주게 된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서 보낼걸. 어차피 다 그 제노 껀데. 사무치게 아쉬워 허튼 생각까지 뭉게뭉게 피어났다. 정줄을 놔서 제노의 코 앞까지 간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차피 계속 정신은 없었을 거다. 거리가 상당히 좁혀지자 제노가 갑자기 끌어안았다. 그야말로 갑자기.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쉰다.

 

.. 제노. 제노야.

..

노야, 왜 그래.

 

꼼짝을 안해서 떼어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마주 안았다. 새근새근한 숨소리를 오랜만에 듣는다. 제노가 먼저 안았으니까 내가 힘 좀 준다고 잘못은 아니겠지? 합리화를 하며 조심스레 등을 당겨 안았다. 한참을 말이 없던 제노가 턱을 어깨에 기대며 몸을 낮춰 매달려왔다. 편하라고 겨드랑이 아래를 받치고 좀더 안정적으로 안았다. 피곤한가. 연습이 고됐나. 뭐에 지쳤지 제노. 하고싶은 말은 재민이 더 많지만 참는다. 있잖아 제노야. 꿈인지 뭔지 신기한 걸 봤어. 열 여덟살 제노가 여기 있었어. 떠들고 싶었지만 기대있는 제노가 자꾸 한숨을 폭폭 쉬어 다시 한 번 참았다. 

 

나재민.

어.

열 여덟 살에는 그렇게 막무가내더니.

어?

왜 이렇게 점잖아졌어?

 

꼭 제가 할 법한 소리를 하는 제노에 어안이 벙벙했다. 열 여덟? 제노야 뭐라고? 재민이 다시 묻는데 묻는 말에는 답을 안하고 팔을 들어 등을 내리친다. 어악. 예상 밖의 일격이라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장난으로 때려도 아프다니까 제노야. 타박을 백날 해도 소용이 없더니 지금도 아프다. 손이 없어 맞은 자리를 문지르지는 못하고 끙, 작게 앓는 소리만 한 번 더 냈다.

 

나랑 살려고 했어?

어?

한강변에 방 네 개짜리 큰 아파트, 그래서 샀어?

 

제노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해 입도 뻥긋 못해본 아파트 이야기가 흘러나와 말문이 막혔다. 다 알고 있었어? 제노가 알았는데도 차인 거면 답이 없었다. 한강뷰의 큰 아파트도 마다할 정도면 진짜 아닌 건가. 속물적인 기준으로는 그렇다고들 했다. 물론 제노는 속물이 아니지만, 희망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같이 살기 싫으니까 찼던 거지 뭐. 부모님 도움 안 받고 마련하느라 고생했는데, 독거노인으로 한강이나 바라보며 늙게 생겼다. 낙담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제노를 안고 있었다. 이 순간은 소중하니까. 오랜만에 안아보니 너무 좋았다. 서로 안아주라고 태어난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꼭 맞을 수가 없다고. 아까 어린 제노의 손을 놓기 싫었던 것처럼 어른 제노를 품에서 놔주기도 싫었다. 재민은 원래 손 잡는 것보다 끌어안는 걸 더 좋아했다.

 

그걸 왜 말 안해?

어? 근데.. 어떻게 알았어?

지성이한테 집구경을 시켰는데 걔가 나한테 말 안하겠냐.

 

맞다, 박지성. 뒤늦게 떠오른 사실에 이마를 쳤다. 늘 보던 패턴이다. 평소엔 재민한테 찰싹 붙어 있어도 가만보면 제노에게 조잘조잘 애교 부리고 있었다. 차라리 재현이 형이나 이해찬 데리고 갈걸. 계약 직전에 부동산에서 한 번 더 둘러 보시라고 연락이 와 같이 갔었다. 제 눈에야 다 흡족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땐 어떤가 싶어 동행을 구했는데 다들 시간이 안맞았다. 하고많은 중에 하필 지성이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집구경은 예견된 참사였다. 내내 우와우와와 떨떠름한 표정짓기만 번갈아 했었다. 한강뷰라 그런지 강이 잘 보인다는 아무 도움도 안될 소리만 하고. 제노한테는 비밀이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저녁으로 사멕인 한우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홀랑 불어버렸을 게 뻔했다. 이 배신자를 어떡하지. 

 

한강변에 아파트 사서 같이 사는 게 꿈이었다며. 나재민 대단하네. 한다면 하는 남자네.

 

그렇게 말하면서 등을 계속 때렸다. 대단하다는 건지 좀 맞으라는 건지 아리송했다. 그런데 저 소리는 또 어디서 들었대. 박지성한테도, 아무한테도 한 적 없는 얘긴데. 제노에게마저 안했으니 정말 아무도 모를 이야기였다. 때리는 손길이 잦아들 무렵 용기를 낸 재민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다시 생각났다는 듯이 등을 퍽퍽 쳐대며 제노가 답했다. 

 

누구긴 누구야. 나재민이지.

나?

그래, 너! 이 호랑말코 같은 놈아!

 

어휘 선택이 가끔 또래가 아닌 거 같은 제노가 제 이름을 말하면서는 정말 열뻗쳐 하는 게 느껴졌다. 재민은 한동안 잠자코 얻어맞았다. 뭐에 저렇게 화가 났는지는 한풀 꺾인 다음에 찬찬히 들어야 될 것 같았다. 이내 기운을 소진했는지 제 다리로 서있으려 하지 않고 아예 몸을 축 늘어뜨린다. 안아달라는 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하는 제노의 오랜 습관이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재민이 제노를 추슬러 안아올렸다. 안아올리면서 슬쩍슬쩍 옆 얼굴에 입술을 붙였다. 어쩐지 이래도 될 것 같았다. 아파트 명의까지 들고 대차게 차이고도 정신이 차려지질 않는다. 저에게 성질 부리고 어쩔줄 모르게 구는 제노가 좋아서. 예전 같아서.

 

십 년을 말 안하고 어떻게..

..

내가 영영 몰랐으면? 계속 오해 했으면?

오해?

그랬으면 계속 헤어진 채로 있었을 거야?

 

이쯤되면 진짜 어쩔 수 없었다. 등을 두들겨 맞는 게 아니라 발에 밟히더라도 물어봐야 했다. 그러니까 노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스물 여덟의 나재민이 십 년에 걸쳐 완수한 인생의 프로젝트를 제노에게 쏠랑 불어버린 건 열 여덟의 나재민이었다. 우리 아직도 같이 안 살아? 했다는 대목에서 재민은 열 여덟의 재민이 스물 여덟의 자신을 꽤나 한심하게 여겼으리라는 걸 짐작했다. 한강변의 방 네 개짜리 아파트를 자력으로 마련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 철부지가 알 리 없지. 니가 신발만 덜 샀어도, 좀더 지나 차만 안 바꿔댔어도 십 년 안 걸렸을 거다. 어찌되었든 그 우울한 시기에도 기세등등, 포부 하나는 영락 없는 나재민이었다. 제노는 그를 두고 막무가내라고 표현했지만. 

회사 옮기고 집도 보러 다니고 그러면서 말 한 마디 안하는 게 각자 알아서 잘 살자는 신호인 줄 알았단다. 어쩐지. 그 무렵부터 제노가 유난히 까칠하고 시비를 잘 걸었다. 비위를 맞추고 구슬려 뭐에 틀어졌는지를 알아내기에는 재민도 너무 바쁘고 할 일이 많았다. 이러다 큰일나겠다, 같이 살아야돼. 갈수록 그 생각만 뚜렷해져 돈 버는데에 눈이 멀었었다. 생전 안해본 짓이었으나 목표가 그거니까 일단 거기까지 이루면 다 해결될 거 같았다. 핏발 선 눈을 부비며 촬영장을 전전하는 동안 제노는 거의 보지 못했다. 제 쪽에서 연락이 줄고 이야기가 줄어드니 제노도 똑같이 했다. 떨어져 있어도 제노가 뭘 하는지는 대강 짐작을 했었는데, 잘 모르게 됐을 무렵 차였다. 재민이 절 좋아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속으로 앓던 스물 일곱 제노에게 서른 일곱 나재민이 나타나지는 않았으니까. 좋아한다 사랑한다 말해주고 안심시켜줄 환상마저 없어 혼자 정리를 해버렸던 거다. 

난 나중에 우리 같이 잘 살려고 그랬지, 흔한 우리네 아버지 같은 항변은 씨알도 안 먹혔다. 너만 벌어? 같이 살 집을 왜 니가 사? 제노의 일갈에 할 말이 있다가도 없어졌다. 내가 해가야 될 것 같아서, 잠자리 포지션을 고려한 다분히 봉건적인 발언을 했다가는 진짜 독거노인으로 늙을 수도 있었다. 재민은 얌전히 입을 오므렸다. 자세가 절로 공손해졌다.

 

그 큰 돈이 어디서 났어.

그동안 정산받은 거 그대로 모아 잘 불렸고, 새로 옮긴 회사에서 받은 계약금 더해서. 옵션 거의 선금으로 받았어.

독하다 진짜. 

 

독하기 보다는 운이 좋았다. 재민은 데뷔하면서부터 쭉 독립된 경제주체였다. 부모님이 용돈이나 선물을 주시면 주셨지 거둬가는 법이 없으셨으니까. 좋을대로 쓰고 남은 돈을 잘 굴린 것도 한 몫 했다. 그것도 부모님 덕분이 어느 정도 있었고. 돈 문제에 있어서는 날때부터 운이 따르는 편이다.

 

내가 이거저거 물어볼까봐 회사 옮기는 거 말 안했어? 계약금 어따 썼냐고 추궁할까봐?

그것도 그렇고.. 근데 노야 나 말은 했는데.

니가 언제.

그, 하와이 갔을 때 말했던 거 같은데.

하와이? 하와이에서 언제? 

.. 제노 못 들었나보네. 어쩐지 가타부타 말을 안하더라.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재민을 빤히 보며 제노가 기억을 되짚었다. 드물게 크게 뜨인 눈의 눈동자가 왼편으로 스르륵 굴러간다. 하와이, 하와이. 작년 생일 전이었나? 둘이 마지막으로 여행갔던 곳이다. 서로 길게 시간 뺄 수 있는 때가 2월말이어서, 제노의 생일이 두 달 남았는데도 생일기념 여행이랍시고 갔었다. 열흘 넘게 놀고 먹고 중의적인 의미로 잤다. 사이가 안 좋아질 무렵에 떠나서 진짜 열심히 치열하게 싸우듯 잤고 다녀와서는 그냥 치열하게 싸우기만 했다. 그래서 좋기도 안 좋기도 한 추억이다. 제노는 계속 하와이를 중얼거리며 그때의 행적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퍼뜩 짚이는 바가 있어 인상을 쓰고 재민을 돌아보게 됐다. 

 

너 설마 벗고 있을 때 얘기한 거 아니지? 

 

맞지만 맞다고 하면 큰일날 것 같았다. 재민은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제노는 제노대로 기가 막혔다. 그게 접촉 중인 회사 이름들인 줄 몰랐다. 하와이 맛집 말하는 줄 알았지. 사이좋게 축 늘어져 제노는 살짝 졸기까지 하던 중에 갑자기 영어 이름들을 쭉 나열해서 재민이가 힘써서 배고픈가아, 했다. 피곤한데 룸서비스 시켜어, 뭘 나가. 웅얼웅얼 답까지 했는데. 재민은 듣는둥 마는둥 어디가 좋을까 묻다가 갑자기 여기가 좋아 저기가 좋아 딴길로 새더니만 온갖 더티토크인지 필로우토크인지로 혼자 다시 불 붙었었다. 이게 사건의 전말이고 기억의 전부다. 너 그게 의논이야? 너는 의논을 그렇게 해?

 

어차피 못 듣는다고 그럴 때 중요한 얘기하지 말랬지!

그랬지.

그러고 있는데 무슨 얘기를 해!

 

너는 진짜 좀 맞아야겠다. 제노가 손을 올리자 막지는 않고 피하려고 소파 밑으로 내려갔다. 재민은 애써 착하고 불쌍한 얼굴을 꾸며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을 부풀리고 갖은 아양을 부리는데 제노는 봐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 내려간 김에 꿇자, 꿇어야겠다 일단. 째려보며 말하니 이미 혼나는 얼굴이 된 재민이 웅얼거렸다. 제노야 너 자꾸 오해하는 거 같은데 나는 우리가 하고 있을 때만 잘 꿇는 거야. 다른 때에는 별로 꿇고 싶지 않아. 

 

 

 

 

 

 

 

 

 

 

 

 

 

 

스물 여덟의 제노가 이 멍청이를 어떡하지 한탄하며 문 밖으로 나간 뒤 열 여덟의 재민은 한동안 팔로 눈을 가린 채 서있었다. 그 멍청이 너무 오래 혼내지는 말라고 당부했어야 했는데 못했다. 문을 열기 전 제노가 돌아보며 한 말에 너무 놀라서. 

 

나재민 사랑한다.

 

와. 큐카드에 적혀있는 멘트도 아닌데 제노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줬다. 지금은 그렇게 졸라도 한 번을 안해주는 말이다. 이제노한테 사랑해 소리를 돌려 받느니 산에 올라가 메아리를 기다리는 게 빠르겠다고 투덜댄 게 엊그제 일이었다. 사랑해 소리를 포기하고 뽀뽀나 해달랬더니 그것마저 싫다고 해서 싸운 적도 있다. 그런데 막, 막 이렇게 해주네? 너무 멋있어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계속 잘 붙어있는지 가슴께를 더듬어 확인해야 했다. 녹음할걸. 분명히 들었는데 증명할 방법이 없네. 벅찬 감격도 잠시, 스물 여덟 나재민한테 슬슬 열이 받았다. 대체 뭐가 문제야? 제노가 저렇게 섹시하고 멋있고 섹시하고 근사하고 섹시하고 심지어 사랑한다는 소리까지 잘 해주는데. 왜 아직도 같이 못 사냐고! 설마 능력이 안 되나? 안 되면 되게 해야지 뭐하는 거야. 욕을 씹으며 눈을 가렸던 팔을 내리자 온통 하얗게 번지던 빛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유리문 너머로 하늘색 머리를 한 제노가 울상을 하고 서 있다. 얼른 문을 열어주니 한달음에 쫓아와 안긴다. 받아 안는데 낯선 향수냄새가 훅 끼쳤다. 아 설마. 

 

제노야.

응?

그 새끼가 어디어디 만졌어.

아저씨 재민이?

어.

안 만졌어. 만지지는 않았는데?

그럼. 만지지는 않고 뭐했어?

그냥 뭐.. 근데 재민아 그거 어차피 너잖아.

나여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지. 이제노, 너 설마 된다고 했어?

그게 아니라아.., 너도 그럼 스물 여덟 이제노 만났어? 너는 안 만졌어? 만졌어?

 

꼭 끌어안고 서로 만졌니 안 만졌니를 따지자니 기분이 좀 그래서, 재민이 살짝 몸을 떼고 제노의 얼굴을 찾아쥐었다. 잠시 눈을 맞추다가 짧게 입을 맞추고 한숨을 쉬었다. 오케이 그럼 스루하자. 안 만졌다니 어찌되었든 저보다 뭐를 더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제노가 아저씨라 부르는 스물 여덟 나재민은 인내심이 있는 편인가 보다. 집 마련하는 데까지 그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재민이 속으로 십 년 뒤의 자신을 두고 삐딱하게 비꼬는 사이 기분좋게 웃던 제노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된다. 

 

왜. 왜 또 울상이야.

아저씨가 이상한 말 해서.

뭐라디.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붕붕 젓는다. 제노는 입을 앙 다물고 다시 재민을 꽉 끌어안았다. 재민아아. 자다 일어난 것도 아닌데 부르는 소리가 질질 늘어진다. 이 새끼 진짜 애한테 뭐라고 한 거야. 여기서는 기껏 오해 풀어주고 잘 보내줬는데 거기서는 뭐했냐고. 결국엔 제가 자라 그 재민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걷어차여도 할 말이 없네. 신랄하게 혹평하면서도 품 안의 제노는 옴짝달싹 못하게  끌어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차이기는 싫어서. 

 

.. 스물 여덟 먹은 제노는 뭐래?

나 사랑한대.

으에, 정말?

응. 개멋있었어.

 

흠, 소리만 조그맣게 내고 아무 말을 안하는 게 귀여웠다. 제노 질투해? 재민이 물으면 아니이, 하면서도 옆구리를 꼬집는다. 질투해봤자 자기 자신이고, 못하는 사랑해 소리까지 기꺼이 해줬다니 어쩔 수 없었다. 스물 여덟의 이제노, 진짜 개멋있을 수도. 그래서 그렇게 키스 잘하는 스물 여덟 재민이 아저씨 만나나보다아. 그 제노가 이 재민에게 사랑한다 소리를 하고 갔다니까 안심이 됐다. 그 재민이 아저씨는 괜히 이상한 소리는 해가지고. 버리느니 마니. 내가 잘못 들었던 건가? 솔직히 엄청 작은 소리였어서 확실하지 않다. 입 꾹꾹이를 하며 이리저리 생각하는데 재민이 몸을 떼고 볼을 잡아 당겼다. 

 

너는 걔 어땠어?

누구?

스물 여덟 먹은 나재민.

음.

 

아저씨라고 부르긴 했지만 놀리느라 그런 거지  아저씨 같은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꿈에서 본 것 같은 스물 여덟의 나재민 아저씨. 그냥 뭐. 많이 잘생겼고, 운동해서 몸이 더 딱딱하고 커졌고. 키스 엄청 잘하고, 여전히 나 보면 잘 세우고. 능글맞고, 나 잘 알고, 예뻐하고. 다정하고 간지러운 소리 잘만 하고, 야한 말도 잘 하고. 가만가만 떠올려 봐도 지금의 재민이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들으면 별로 안 좋아할 거 같다. 곤란해서 배시시 웃으며 다시 생각해봤다. 개멋있다고도 하면 안될 거 같아, 그런 느낌이 들어.

 

어른스러웠어.

어른스러웠다고?

엉.

어른이 그럼 어른스러워야지. 근데 별로 안 그럴 거 같던데.

아니야. 어른스러웠어. 좋은 말 해줬어.

뭐라고.

그냥 뭐.. 좋은 말, 이것 저것.

 

어린 재민이도 다 모를 정도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했다고는 도저히. 재민이가 십 년 뒤의 자기 자신에게 이를 가는 해괴망측한 꼴은 보고싶지 않아 얼버무린다. 제노는 근래 들어 가장 격앙되어 있는 재민이를 꼼꼼히 살펴보며 웃었다. 분노는 나의 힘인가. 기운이 난 것 같아 좋았다. 재민이가 기분 좋고 씩씩하면 제노도 그렇게 된다. 제노는 재민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빠르게 붙였다 떼어냈다. 좋아서. 복잡하고 어려웠던 문제들이 갑자기 풀린 것 같았다. 내일이나 모레는 또 힘들어질지 모르지만 일단은, 지금은 괜찮다. 웃으면서 다시 입술을 쪽 소리가 나게 붙였다 떼면 재민이 숨을 헙, 하고 들이마셨다. 

 

자꾸 왜 그래 노야, 여기 연습실이야. 

 

허. 저번에 우리가 연습실에서 했던 건 다 뭐였더라. 또다시 이상한 타이밍에 부끄럼을 타는 재민에게 제노가 속삭였다. 아저씨가 나한테 뽀뽀했어. 키스했다고 하면 큰일날 것 같아 적당히 축소해서 전하면 커다란 눈을 도로록 굴리고는 제노의 머리를 잡고 다짜고짜 입술을 물었다. 분노는 나의 힘이 아니라 질투는 나의 힘이었지. 아저씨 덕분에 오늘 키스 두 번이나 하네. 거칠고 급하고 숨 막히고. 능숙하던 아저씨 재민이도 좋지만 아무래도 이 재민이가 더 좋다. 눈을 감고 재민의 목을 그러안은 제노가 슬쩍 웃었다. 아이스크림 케익 먹으러 가야되는데. 한참 이따 먹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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